문창훈의 제목을 못정한 편지 -경주 여행기-
- 문창훈의 일상이야기
- 2020. 12. 15. 11:13
이 글은 제가 경주 불국사를 다녀온 이야기를 편 시 양식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불국사 하면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가본 대한민국 유적지중 한 곳이야 그리고 절 하면 먼저 떠오르는 곳이 불국사 이기도 하지 대한민국 수학여행 1번지 이 아버지하고 미리 떠나 보자꾸나 불국사를 가기 전에 석굴암이라는 곳을 가보도록 하자.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제위 당시 재상 김대성이 처음 건립하였는데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불렸단다 경덕왕 때에는 석굴암 외에도 불국사 황룡사 대종 등 많은 문화재들이 만들어져 불교예술이 전성기를 이루었단다.
석굴암은 인도나 중국의 석굴과 달리 화강암을 인공으로 다듬어 조립한 이 석굴은 불교 세계의 이상과 과학기술 그리고 세련된 조각 솜씨가 어우러진 걸작이단다.
삼국유사에 김대성이 전세의 부모를 위하여 건립했다고 전하는 석굴암은 신라 예술의 극치이자 동양 불교미술의 대표적 작품으로 평가되어 1995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되었단다.
이 아버지가 석굴암을 처음 본 것은 중학교 수학여행 때 보았는데 중학생 때에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는데 지금 와서 보니 석굴암이 영험한 기운을 가지고 있는 게 느껴지더라 이 아버지는 1년에 한 번씩 경주에 와볼생각이야 석굴암을 보고 나니 흔들리고 있는 나를 다시 잡아주는 것 같고 1년씩 지날 때마다 어떤 느낌인지 느끼고 싶구나. 석굴암을 보고 나오니 종소리가 들리기에 가보니 타종을 하고 가족끼리 와서 타종을 하고 있더라.
이 종각을 설명하자면 불국 대종각 또는 석굴암 통일기 원대 종각이라고도 부른단다. 1988년 불국사 조실 월산 스님의 발원으로 통일기원의 대종을 만들고 그 대종을 걸기 우한 종각을 건설하였단다. 경관이 가장 좋은 곳을 택하여 +형 누각식 대종각을 건설하였는데 경사면을 이용하여 석굴암 쪽에서는 단층이고 전면에서는 누각식으로 하였단다. 기본설계와 구성은 전라북도 완주의 송광사 종각에서+자를 얻었단다.
타종을 하려면 1회에 천 원씩 내야 하는데 이 아버지도 천원을 내고 우리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빌며 타종을 하었단다. 타종을 끝내고 불국사로 가야 하는대 석굴암에서 불국사 가려면 2가지 방법이 있는데 버스를 타고 가는 방법이 있고 걸어서 내려가는 방법이 있는대 약 2km 정도 걸어가면 불국사에 다다를 수 있단다.
불국사를 들어가기 전에 불국사 창건 이야기를 들려줄게. 불국사는 누가 언제 지어졌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변천했는지 처음부터 직접 기록되어 전해지는 사적은 없단다. 그리고 고려시대에 집필된 삼국사기 엔도 불국사에 대한 기록은 없고 다만 그 이후에 기록된 삼국유사나 조선시대 중기 이후에 기록된 불국사 고금 창기나 불국사 사적기 그리고 최치원 선생이나 김시습 선생을 비롯한 유명 인사가 불국사를 찾아 당시의 모습과 감회를 표현한 글 몇 편만 전할 뿐이라고 한단다.
조선시대는 임진왜란 직전까지만 하여도 범영루에 모여 시회를 열만큼 나라가 평온할 때는 절도 한가로웠단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닥치면서 큰 시련을 겪게 된단다. 임진왜란으로 유독 불국사만 피해를 본 것이 아니지만 불국사는 임진왜란으로 큰 시련을 격게 된다.
임진왜란 잉 발발하자 서산대사와 사명대사는 승군을 조직하여 국난 극복에 나섰단다 그러다 보니 전국의 모든 절이 왜군의 공격 대상이 되었지 그런 왜군들은 우리나라 사찰들을 곱게 볼리 없었고 결국 전국의 많은 절들이 불에 타게 되었지 이 때문에 우리의 귀중한 문재화가 재가 되어 사라졌단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절의 내력을 살펴보면 임진왜란 때 소실된 절이 참 많단다. 그 바람에 위태로운 나라는 구했지만 그 대가로 너무나 많은 문화재를 잃게 되었지. 임진왜란이 끝나고 오랜 세월에 걸쳐 중수가 이루어졌지만 조선 말기 국력이 쇠퇴하면서 자연적으로 불국사를 돌볼 여력도 줄어들게 되었지 1914년 경에 찍은 불국사 사진을 보면 당울어 가는 나라의 처지와 다를 바 없어 보이지 다보탑의 돌사자장과 부도를 마음대로 가져가서 자기네들 정원을 장식하는 악해을 저지르기도 했단다.
1970년대에는 우리 국력도 문화재 보수에 힘을 기울일 만큼 나아졌고 그때 이르러서야 불국사도 대보수에 들어가게 되었단다 이토록 아버지가 불국사의 창건과 소실에 대해서 길게 이야기하는 것은 문화재는 우리 조상님들이 물려주신 위대한 유산이고 그것을 지키지 못한 것을 다시 반복하지 말자는 뜻이다. 그리고 네가 역사를 바로 배워 후세 네 자식과 손자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주고 왜곡된 역사를 배우지 말라는 이 아버지의 바람이다.
불국사 전면 축대를 대 석단이라고 하고 대석단 왼쪽 연화교와 칠보교는 극락적으로 오느른 계단이고 오른쪽 청운교와 백운교는 대웅전으로 가는 큰 계단이단다 청운교 위 지하 문이 주 출입구 단다.
단단한 돌을 세밀하게 가공 목제 가구 만들 듯 짜 맞춘 공법 자연석 모양에 맞추어 장대석을 도려내 결합시킨 기법 축대를 튼튼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기술 등은 정말 신라 장인들이 혼을 느낄 수 있단다 연화교와 칠보교는 국보 제22호 청운교와 백운교는 국보 제23호 단다.
불국사 안에는 2개의 답이 있단다. 하나는 다보탑 이하고 하나는 석가탑 이단다. 석가탑은 국보 제21호 이고 대웅전 앞뜰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고 통일신라 경덕왕 10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측된단다. 그리고 지난 1966년 석탑 해체 수리 시 사이와 함께 금동 제외합과 은제 내 합, 세계 최초의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 대다라니경 등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고 탑신의 사리공에서 사리 1과와 사리 엄장 구가 발견되었고 최근에는 기단 속 불상이 나왔다고 하더라
석가탑을 보러 가보니 해체 작업이 이루어져 유리관에 둘러싸인 해체 작업이 된 석가탑을 볼 수 있었단다.
그리고 다보탑 이야기를 하자면 10원짜리 동전에 있는 탑이 다보탑 이단다. 다보탑은 국보 제20으로 대웅전 앞 서쪽의 석가탑 맞은편에 자리 잡고 있지. 두 탑을 동서로 나란히 세운 까닭은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하는 것을 과거의 부처 인 다보불이 옆에서 옳다고 증면한다는 내용에서 따른것이라구나 탑 설명을 했으니 탑 세는 법을 알려주도록 할게 탑은 가장 아래의 받침 부분 가운데 몸 동부분 맨 위의 장식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다른 거 다 필요 없이 몸통 부분의 지붕의 개수만 세면 된단다. 우리나라의 탑은 대부분 3,5 홀수로 되어 있단다 간혹 경천사지 10층 석탑처럼 짝수의 석탑이 있는데 이건 우리의 전통 탑이 아니라 몽골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란다. 그리고 탑은 불상보다 먼저 만들어졌는데 부처님께서 형상을 보는 것보다는 진리를 보라고 하셨기 때문에 부처님 열반 후 바로 불상을 만들지 않고 부처님의 몸에서 나온 사리를 탑을 세워 그 속에 봉인해 모신 것에서 출발한단다.
그리고 탑은 재료에 따라 목탑, 석탑, 전탑으로 구분되는데 자연적 여건과 관련되어 중국에서는 전탑 일본에서는 목탑이 유행하었단다. 우리나라에서도 초기에는 목탑이 많이 건립되었지만 대부분 소실되었고 삼국시대 말 이후에는 주로 주로 석탑이 건립되었단다 목탑은 나무로 만들어서 목탑이라고 부르고 전탑은 벽돌로 쌓은 탑을 건립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인공을 가하여 벽돌로 생산해야 했기에 힘들었고 모전석탑은 벽돌 모양의 모 전석을 쌓아 많든 것이고 청동 탑은 금속으로 만들어진 탑이고 석탑은 돌로 만들어진 탑이란다.
불국사에는 대웅전과 앞과 극락전 앞 바로 중간에 석등이 각각 한 개씩 놓여있단다. 석등은 불을 밝히는 것으로 이용되었지만 부처님의 불법을 밝힌다는 상징적인 의미도 지닌다고 하단다.
불국사 안 관음전을 가보자꾸나 관음전은 이름 그래도 관음보살상을 안치한 전각이단다. 관음보살이란 관세음보살을 줄여서 부른 이름이단다. 관세음보살에서 관세음 이란 세상의 소리를 본다라는 말인데 소리를 본다는 게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는 그만큼 세상 사람들의 고통에 찬 소리를 알뜰살뜰히 귀 기울어 보살핌을 의미한단다.
불국사 관음전 안에는 관음보살상이 서 있고 그 뒤에는 천수 관음도가 걸려 있더라 손이 천 개가 되니 많은 중생의 고통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영험을 가진 듯하더구나 관음보살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 중에 십일면 관음도 있는데 중생들의 다양한 어려움을 보고 열 한 가지 표정을 짓는다고 하여 십일면 관음상을 조성했다고 하더구나 비로전은 불국사에서 대웅전과 극락전 다음으로 큰 공간이고 이름 그대로 바 로자나 불을 안치한 전각이단다. 바 로자나 불은 태양신 바이로차나를 음역 한 말로 의역해서 대일여래라고도 한단다.
비로전 안에 든 국보가 26호인 비로자나불 좌상이 안치되어 있다. 비로자나불상 수인은 지권인이라 하여 보통 곧게 편 왼손 집게손가락을 오른손이 잡고있는 모습을 볼 수 있어 집게 손가락을 세운 아래의 왼손은 중생을 그 집게손가락을 감싸고 있는 위의 오른손을 법계라고 하며 위에 있는 손인 법계가 중생을 보호하는 형상을 상징하고 또한 중생과 법계는 별개가 아닌 한 몸임을 나타내 내고 있어 그런데 불국사 수인은 오른손과 왼손이 바뀌어 있지
불국사의 아미타여래나 비로자나불은 모두 왼손잡이인 셈이지 대부분의 비로자나불상이 오른손이 왼손을 감싸는 우권인데 비하여 불국사 비로자나불은 왼손이 오른손을 감싸고 있는 좌권으로 좌권인이 조정된 사례는 흔하지 않는다고 하구나 무설 절 안에는 김교각 지장보살상이 라고 있단다 무설전 안에 안치된 이 지장 보살상은 지난 1997년 김교각 스님의 탄신 1300주년을 맞아 중국 구화산 화성사로부터 기증받은 김교각 지장 보살상이라고 한단다. 김교각이라는 분은 697년에서 794년까지 살았던 실제 인물이고 통일신라 시대 중국에 불경을 공부하러 유학 갔다가 안휘성에 있는 구화산의 경치에 매로 되어 그곳에서 불도를 닦고 일생을 보낸 분이단다. 그는 그곳에서 살아있는 지장보살로 추앙받았고 주변 사람들이 고국인 신라에 언제 돌아가느냐고 믈으니 1300년 뒤에 돌아간다고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단다.
옛날 그의 이 말대로 구화산 화성사에서는 김교각 스님이 태어난 697년의 1300년 후가 되는 1997년에 그의 청동 입상 불을 제작하여 우리나라로 보냈다고 하는데 그 불상이 바로 지장 보살상이단다.
지장 보살상을 끝으로 불국사를 나오면서 보니 가족들끼리 여행을 많이 왔더구나 나중에 우리 꼭 같이 불국사에 같이 와서 구경도 하고 절도 하고 타종도 해보고 싶네 경주에 와보니 스탬프 투어라고 있더구나 이 아버지는 3곳밖에 찍지를 못했는대 나중에는 우리 같이 여행을 다니면서 꼭 스탬프를 다 채우자꾸나
2017년 5월의 어느 멋진 날에 아버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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